인사이트 일기

천재를 만나면 보내주자

Woonys 2021. 11. 17. 0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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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공부한 내용을 정리하기 전에 마음을 다잡을 겸 글을 쓴다. 오늘도 여전히 좌절 모드...였지만! 애초에 제로 베이스로 먼저 공부한 사람들을 단숨에 따라잡는 건 욕심이라는 걸 상기하자. 매 순간 문제를 만날 때마다 숨이 턱턱 막히지만 사실 안 막히고 술술 풀면 그게 이상한 거지 않나?

 

나는 재능이 출중한 사람이 아니다. 컴퓨터를 잘한다고 생각해서 개발자에 도전한 게 아니다. 지금 이 자리에 오기까지, 의사결정의 근거에 적성이 있지 않았다. 예전에 그림 공부할 때를 떠올려보자. 졸라맨도 제대로 못 그리던 사람이 일정 수준 이상으로 드로잉 실력을 쌓기까지 방법은 다른 게 없었다. 그냥 매일 한 장씩 드로잉 연습을 했던 것 뿐이다. 그걸 해낼 수 있던 이유 역시도 그림에 재능이 있다고 생각해서가 아니었다. 패션 디자인이 하고 싶다는 목적이 명확했고 그걸 하기 위해서는 드로잉 실력을 길러야 했을 뿐이다. 어제는 못 그리던 걸 오늘은 그리게 되는 경험이 조금씩 조금씩 쌓이는 과정에서 그날그날 느꼈던 즐거움 뿐이다. 당연히 그 순간순간에는 "왜 더 잘 못 그리지"라고 괴로워했지만 돌아보니 남은 건 수북히 쌓인 연습장과 예전에는 생각도 못했던 결과물이었다. 그건 절대 짧은 순간에 만들어지지 않았다.

 

힘들 때마다 찾게 되는 글이 하나 있다. 천재 만화가로 불리는 이현세 교수님의 글인데, <천재와 싸워 이기는 방법>이라는 글이다. 아래 전문을 소개한다.


“천재와 싸워 이기는 방법” – 만화가 이현세

 

살다 보면 꼭 한번은  재수가 좋든지 나쁘든지  천재를 만나게 된다.
 
대다수 우리들은 이 천재와 경쟁하다가 상처투성이가 되든지, 아니면 자신의 길을 포기하게 된다. 그리고 평생 주눅 들어 살든지, 아니면 자신의 취미나 재능과는 상관없는 직업을 가지고 평생 못 가본 길에 대해서  동경하며 산다. 이처럼 자신의 분야에서 추월할 수 없는 천재를 만난다는 것은 끔찍하고 잔인한 일이다. 어릴 때 동네에서 그림에 대한 신동이 되고, 학교에서 만화에 대한 재능을 인정받아 만화계에 입문해서 동료들을 만났을 때, 내 재능은 도토리 키 재기라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그 중에 한두 명의 천재를 만났다. 나는 불면증에 시달릴 정도로 매일매일 날밤을 새우다시피 그림을 그리며 살았다. 내 작업실은 이층 다락방이었고 매일 두부장수 아저씨의 종소리가 들리면 남들이 잠자는 시간만큼 나는 더 살았다는 만족감으로 그제서야 쌓인 원고지를 안고 잠들곤 했다. 그러나 그 친구는 한달 내내 술만 마시고 있다가도 며칠 휘갈겨서 가져오는 원고로 내 원고를 휴지로 만들어 버렸다. 나는 타고난 재능에 대해 원망도 해보고  이를 악물고 그 친구와 경쟁도 해 봤지만 시간이 갈수록 내 상처만 커져갔다. 만화에 대한 흥미가 없어지고 작가가 된다는 생각은 점점 멀어졌다. 내게도 주눅이 들고 상처 입은 마음으로 현실과 타협해서 사회로 나가야 될 시간이 왔다. 그러나 나는 만화에 미쳐 있었다.

새 학기가 열리면 이 천재들과 싸워서 이기는 방법을 학생들에게 꼭 강의한다.
그것은 천재들과 절대로 정면승부를 하지 말라는 것이다.
천재를 만나면 먼저 보내주는 것이 상책이다.
그러면 상처 입을 필요가 없다.

작가의 길은 장거리 마라톤이지 단거리 승부가 아니다.
천재들은 항상 먼저 가기 마련이고, 먼저 가서 뒤돌아보면 세상살이가 시시한 법이고,
그리고 어느 날 신의 벽을 만나 버린다.

인간이 절대로 넘을 수 없는 신의 벽을 만나면  천재는 좌절하고 방황하고 스스로를 파괴한다.
그리고 종내는 할 일을 잃고 멈춰서 버린다.

이처럼 천재를 먼저 보내놓고 10년이든 20년이든 자신이 할 수 있다는 생각으로 하루하루를 꾸준히 걷다 보면 어느 날 멈춰버린 그 천재를 추월해서 지나가는 자신을 보게 된다.
산다는 것은 긴긴 세월에 걸쳐 하는 장거리 승부이지 절대로 단거리 승부가 아니다.

 

만화를 지망하는 학생들은 그림을 잘 그리고 싶어한다. 그렇다면 매일매일 스케치북을 들고 10장의 크로키를 하면 된다.

1년이면 3500장을 그리게 되고 10년이면 3만 5000장의 포즈를 잡게 된다.
그 속에는 온갖 인간의 자세와 패션과 풍경이 있다.

한마디로 이 세상에서 그려보지 않은 것은 거의 없는 것이다.
거기에다 좋은 글도 쓰고 싶다면, 매일매일 일기를 쓰고 메모를 하면 된다.
가장 정직하게 내면세계를 파고 들어가는 설득력과 온갖 상상의 아이디어와 줄거리를 갖게 된다.

자신만이 경험한 가장 진솔한 이야기는 모두에게 감동을 준다.
만화가 이두호 선생은 항상 “만화는 엉덩이로 그린다.”라고  후배들에게 조언한다.
이 말은 언제나 내게 감동을 준다.
평생을 작가로서 생활하려면  지치지 않는 집중력과 지구력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다.

가끔 지구력 있는 천재도 있다.
그런 천재는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축복이고  보는 것만으로도 감사하다.
그런 천재들은 너무나 많은 즐거움과  혜택을 우리에게 주고 우리들의 갈 길을 제시해 준다.
나는 그런 천재들과 동시대를 산다는 것만 해도 가슴 벅차게 행복하다.

나 같은 사람은 그저  잠들기 전에 한 장의 그림만 더 그리면 된다.
해 지기 전에 딱 한 걸음만 더 걷다보면 어느 날 내 자신이 바라던 모습과 만나게 될 것이다.
그것이 정상이든, 산중턱이든 내가 원하는 것은 내가 바라던 만큼만 있으면 되는 것이다.


위에서 만화가를 개발자로 바꾸면 토씨 하나 틀린 내용이 없다. 언제나 마음에 새기는 글.

 

 

천재를 만나면 보내주자.
그런 사람과 동시대에 살고 있다는 것에 감사하며 많이 배우자.
그리고 나는 내 갈 길 가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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