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일기

애자일을 하기 위해 애자일을 도입하는 건 애자일이 아니다(feat. 함께 자라기)

Woonys 2022. 7. 11. 00: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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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자일을 하기 위해 애자일을 도입하는 건 애자일이 아니다.

 

이 무슨 말 같지도 않은 말인가 싶겠지만, 애자일(Agile)이라는 개념을 온전히 받아들이기에 앞서 반드시 명심해야 할 구문이다. 대체 애자일이라는 게 무엇이길래 이토록 아리송한 말을 꺼내는 것일까? 열정 넘치는 PM 친구의 이야기를 하나 들어보자.

 

열정 넘치는 3년 차 PM인 A는 그간 열심히 공부했던 애자일 프로세스를 새로 들어간 회사에 전파하려 한다. 날마다 팀원들과 모여 업무를 공유하는 데일리 스크럼, 1~2주 단위의 짧은 주기로 제품을 개발 및 개선하는 스프린트와 매 스프린트가 끝난 후 어땠는지를 논하는 회고까지. 공지를 올려 팀원 및 팀장 앞에서 세미나를 연다. 하지만 뭔가 이상하게 흘러간다.

 

  1. 실무에 적용하려는데 상사나 동료의 지원 없이 추가로 일하려니, 시간이 모자라 계속 미루다 흐지부지된다.
  2. 팀원 및 팀장들에게 전파 교육을 하지만 그들 가운데 몇몇은 이걸 왜 하는지 필요성도 못 느끼는 상태에서 강제로 해야 한다는 스트레스를 받아 부작용이 생긴다.
  3. 배운 것을 팀 내에서는 열심히 적용하지만 이를 지원해주는 상위 관리자가 없어 확대에 실패하고, 해당 팀은 별난 조직으로 치부된다.
  4. “그런 거 없이도 일 잘만 하는데 괜히 그런 거 하다가 너희 팀 이번에 성과 더 안 나오더라"며 상사와 갈등을 겪는다.

어딘가 익숙하다. 저 PM만의 이야기가 아니고 애자일 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열정을 갖고 회사 문화 혹은 프로세스를 바꿔보려고 아등바등하다 실패하거나 좌절한 경험이 있다면 모두가 공감할 내용이다. 그저 잘해보려고 했던 것뿐인데, 무엇이 문제였을까? 다시 애자일 개념으로 돌아가 보자.

 

애자일이라는 단어는 스타트업에 종사하는 사람이라면 한 번쯤은 꼭 들어봤을 말이다. ‘기민한, 민첩한’ 으로 번역하는 이 단어는 불확실성 그 자체인 스타트업 환경 속에서 제품과 사업을 키우기에 가장 적합한 프로세스라고 이해하고 있다. 그러면 이를 실체화한 애자일 프로세스란 무엇일까? 애자일을 몇 번 들어봤거나 회사에서 적용하고 있다면 자연스럽게 데일리 스크럼, 스프린트, 회고와 같은 방법론이 떠오른다. 아직 애자일 문화가 자리 잡지 않은 회사에 다니고 있는 사람이라면 어떻게든 적용하고 싶은 것들이다. 이미 회사에서 이를 하는 사람이라면 만족감을 느끼거나 혹은 왜 하는지 도통 이해를 못 할 수도 있다. 그런데 정작 애자일 문화를 전파하는 애자일 코치들은 방법론을 실천하는 그 자체가 중요한 게 아니라고 단언한다.

 

애자일 문화를 소개하는 책 <함께 자라기>에서는 심지어 서두에 애자일 얘기를 꺼내지도 않는다. 크게 세 단원으로 나눠진 목차에서 가장 먼저 나오는 건 “자라기"이다. 그다음이 “함께”. 전체 220페이지인 책에서 거의 끝자락인 193 페이지까지 가서야, 겨우 30페이지도 채 되지 않은 분량에 “애자일"이라는 단어가 처음 나온다. 이쯤 되면 대체 애자일이 뭐길래 이토록 호들갑인가 싶다. 무슨 무공비급이라도 되는 걸까?

 

무공비급. 이게 애자일을 대변하는 가장 좋은 말일지도 모른다. 사부가 드디어 전해준 무공 비급을 보고 온갖 화려한 고급 무술이 담겨있을 것이라 꿈꾸지만 책에는 고작 세 줄의 문장만 적혀있다. “팔굽혀펴기 100번, 윗몸일으키기 100번, 스쿼트 100번. 그리고 달리기 10km. 이걸 매일 하는 거야.” 그걸 이 책에서는 한 문장으로 표현한다.

 

함께 자라기.

 

이것이 애자일?!

 

애자일이라는 개념이 나오게 된 배경을 보자. 애자일은 전통적인 개발 방식이었던 폭포수(Waterfall) 방식으로는 갈수록 불확실성이 높아지는 소프트웨어 개발 환경에 더 이상 적용하기 불가능하다는 문제의식에서 탄생했다. 이 문제를 해결하고자, 빠르게 학습하고 기민하게 협력하면서 소프트웨어를 개발하고자 한 것이 애자일의 배경이다. 여기까지는 협소한 의미의 애자일이다. 그런데 위의 배경에서 핵심은 무엇일까? “갈수록 불확실성이 높아지는" 게 과연 소프트웨어를 개발할 때뿐일까? 그걸 적용하는 과정에서 우리의 업무처리 방식은? 아니, 당장 우리의 삶도 불확실성이 높으면 높았지, 절대 낮지 않지 않나? 책의 서두에 “자라기”가 먼저 나오고 그다음에 “함께”가 나오는 이유도 같은 맥락이다. 애자일 문화를 단순히 제품을 개발할 때로 한정 짓지 않고 삶으로 확장했을 때 비로소 우리는 제대로 “애자일하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글의 서두에 언급했던 PM 친구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수 있었을까? 책에서는 “방법론의 문제가 아니다"라고 말한다. 이러한 문제들은 해당 방법론 자체의 문제가 아닌 이를 적용하는 과정에서 생기는 사회적 문제이다. 따라서 “아무리 기술적인 실천법이라고 해도 그 기술은 사회적 맥락 속에서 실천되어야 하며 기술의 성공을 위해서는 사회적 자본과 사회적 기술이 함께 필요하다”고 책은 말한다. 즉, 방법론이 옳고 그른가가 아닌 그것을 전파하는 사람이 조직 내에서 얼마나 단단한 사회적 자본, 즉 그가 얼마나 팀으로부터 신뢰를 받고 있는가가 훨씬 중요하다. 마치 사람을 설득하는 3요소(에토스, 파토스, 로고스) 중 가장 중요한 것이 에토스, 즉 메신저가 누구냐인 것과 매한가지다.

 

책에서 말하는 애자일을 적용하기 위한 방법은 스크럼, 스프린트, 회고 따위가 아니라고 말한다. “불확실성 속에서 제품과 사업을 개발하기 위해 고객이 프로젝트에 참여하고 있는가?”, “매일 나누는 스크럼 속에서 팀원들 사이에 감정을 공유하고 있는가?” “기저에 신뢰를 쌓기 위해 일상에서 마이크로인터랙션을 하고 있는가?” “우리 구성원들이 회사로부터 충분한 심리적 안전감을 받고 있는가?” 스타트업은 유치원이 아니라는 말도 있던데, 누구는 프로 축구팀이라고 하던데, 뛰어난 스킬 셋으로 무장한 냉철한 전문가 집단이어야만 할 것 같은 구성원들에게 가장 중요한 건 이런 것들이었다. 이는 내가 주장하는 “스타트업 성공 방정식 3요소" 중 마지막에 해당하는 “공적 유대감"과도 일맥상통한다.

 

최근에 EO 영상으로 접했던 기업인, X세대 의류 커머스 퀸잇으로 유명한 회사 라포랩스에서는 자신들의 인재상을 “일 잘하는데 따뜻한 사람"이라 말한다. 이 책을 읽고서 확신이 들었다. 이들은 애자일 문화를 제대로 이해하는 몇 안 되는 회사 중 하나일 것이다. 이 글을 읽는 사람들 역시 열정을 갖고 프로세스를 개선하기 이전에 이를 함께하는 동료들과 충분히 감정을 공유하고 있는지부터 돌이켜본다면, 그리고서 어떻게 성장하면 좋을지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고민한다면, 이미 그 회사에는 애자일의 씨앗이 싹텄을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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