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변화하기 가장 쉬울 때가 언제일까? 엄청난 충격을 받았을 때다. 고3 현역 시절이 그랬다. ‘그냥 원서 쓰면 대학 가는 거 아냐?’ 정도의 안일한 생각으로 원서를 썼다. 물론 어느 정도 자부심도 있었다. 이과 출신이 신방과를 지원하는데 나름 스펙도 괜찮다고 자부하고 있었다. 물론 실제로는 개판이었다. 지금 보면 너무나 당연하게도 떨어질 수밖에 없던 결과였는데 그 당시에는 존재 자체가 부정당하는 느낌을 받을 정도로 데미지가 컸다. 정시까지 다 끝난 뒤, 집에서 몇 날 며칠을 이불 뒤집어쓰고 울었던 기억이 난다.
그 뒤, 재수했다. 서울에 올라온 첫날 밤, 스스로 약속 10가지 정도를 작성했다. 대부분은 기억도 나지 않는다. 수능 날까지 지킨 건 딱 3가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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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 하루도 빠짐없이 학원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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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 하루도 책상에 엎드려 자지 않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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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능 전까지 단 하루도 본가로 내려가지 않기
1번 3번은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제일 어려운 게 2번이었는데, 고등학교 때는 엎드려 자는 게 일상이었기 때문이다. 특히 영어 수업은 진짜 한 번도 안 졸아본 적이 없다. 근데 매일 “나는 죄인이다”라는 심정으로 다니니 저것도 결국 이겨낼 수 있었다. 그때는 환경설정의 힘도 몰라 지켜내기 어려운 목표였건만, 살면서 유일하게 의지로 버틸 수 있던 시기였기에 가능했다. 그렇게 습관이 만들어지니 쭉 이어졌다. 대학교 때 역시 단 한 번도 수업 때 잠을 잔 적이 없다. 생각해보니 공부를 잘 못 하는 데도 지금까지 올 수 있던 건 이 습관이 컸다.
근데 지금까지도 정말 흥미롭게 생각하는 건, 아무에게도 이 약속을 얘기하지 않았는데 어느샌가 주위 친구들이 내가 안자는 걸 다 알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보통 뭔가를 하는 행위는 눈에 잘 띄지만 하지 않는 행위는 눈에 잘 드러나지 않는다. 그런데 언젠가 애들이 “너는 진짜 안 자더라.”라고 말했을 때, 소름이 돋았다. ‘이걸 어떻게 알지?’ 놀라면서도 다들 보고 있구나, 싶었다.
고등학교 때 한 친구가 그랬다. 사람들은 흰자위로도 본다고. 무의식중에 그 사람의 이미지가 초점 너머로도 쌓인다. 그게 차곡차곡 쌓여 그 사람의 모습을 만들어낸다. 단순히 말뿐만이 아니다. 사소한 행동마저도 그 사람을 반영하는 중요한 포인트가 된다.
그래서 아주 작은 습관도 무시하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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