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삶이 재밌다고 느끼는데, 그 이유 중 하나가 주관의 해상도가 선명해지는 게 느껴져서다. 예전에는 남들이 멋있다고 하는 거, 세상이 멋있다고 하는 걸 좇았다. 창업이 하고 싶은 게 아니라 해야만 한다고 생각했던 이유도 그래서였고. 그런데 하나하나 경험치를 쌓을수록 나와 맞고 맞지 않는 게 무엇인지 명확해졌다. 남들 다 가려는 대기업은 인턴을 해보니 핏이 맞지 않는다는 걸 느꼈다. 죄를 지어야 간다는 대학원 덕분에 오히려 앞으로 인생에 선택지를 넓히는 자유를 가졌다. 창업은 하고 보니 대표직 맡는 것보다 공감이 가는 큰 문제를 뛰어난 팀과 함께하는 게 더 중요하다는 걸 알게 됐다. 남들 다 아깝다고 하는 신소재 석사 학위보다 IT 산업에 재밌는 게 더 많아서 소프트웨어 개발자로 전직했다.
하지만 주관은 노력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절대 뚜렷해질 수 없다. 선택의 자유를 얻기까지 고생한 시간이 많았다. 남들 보면 그냥 대기업 가고, 그냥 대학원 가고, 그냥 개발자 전직한 것 같겠지만 그렇진 않았다. 짱구 굴려서 얼추 각 나오겠다 싶으면 그다음부터 할 수 있는 건 죽어라 하고 노력밖에 없었다. 학점 따려고 매 학기의 시작부터 끝까지 도서관에서 함께 했고, 창업할 때는 연구실에서 밤 9~10시 퇴근하면 그때부터 아침까지가 근무 시간이었다. 씻는 시간도 아까워서 바로 누워, 해뜨기 직전의 푸르스름한 바깥을 볼 때면 이게 맞는 건가 싶었다. 개발자로 전직할 때도 사실 너무 무서웠다. 이제껏 쌓아놓은 타이틀 진짜 다 버릴 수 있을까 자신이 없었다. 주 100시간 코딩하고 그날 공부한 내용을 블로그에 매일매일 정리하고 나서야 그나마 마음이 놓였다.
그런데도 늘 하고 싶은 걸 선택하려 했다. 주관의 밀도가 어떻게 단단해졌는가 떠올려보니 다 부모님 포함해서 주위 사람 덕분이더라. 어제는 엄마랑 40분 넘게 통화했다. 물려준 게 없다는 엄마 말에 이미 너무 많은 걸 줘서 고맙다고 말했다. 철없을 때는 내가 잘해서인 줄 알았다. 학비도 내가 장학금 타서 벌었고, 대학원도 내가 갔고, 창업도 내가 했고. 하지만 결국 깨달은 건 "나 혼자서 한 건 아무것도 없다"였다. 물질적으로 물려받을 게 많았다면 절대 악착같이 공부 안 했을 거다. 이때 긴 호흡으로 공부한 게 평생 자산이 됐다. 창업이라는 고된 여정을 보낼 수 있던 것도 먼저 손 내밀어준 친구 아니었으면 못 했다. 개발자로 커리어 전환한 것도 장병규 의장님이 사회 환원 취지로 정글 프로그램 안 만들었으면 못 했을 거고. 세상에 감사한 사람들이 많은 덕분이다. 그 어느 때보다 행복하다. 빚진 게 참 많고, 늘 갚는 마음으로 살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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