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글사관학교 개발일지

SW사관학교 정글 WEEK01(5일차) 후기

Woonys 2021. 11. 6. 23: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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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니까 신소재공학과를 전공하셨던데 학부 때는 패션 디자인 쪽을 건드렸고. 대학원 와서는 경영 쪽을 건드리고. 창업도 하고. 그러면 신소재는 왜 계속하신 거예요?"

 

면접이 끝나고 질문을 복기하던 중, 의장님께서 면접에서 가장 먼저 던진 질문이 계속 마음에 남았다. 그간 나는 어떤 인생을 살아왔던 걸까.

서류 제출에 그간 자신이 살아온 이력을 쭉 적는 칸이 있었다. 대학교 입학 때를 기점으로 무엇을 하고 살았나 쭉 적어봤다. 생각보다 많은 걸 했다 싶으면서도 고작 열 몇 줄로 요약되는 삶에 허탈한 느낌도 들더라. 그나마 굵직한 사건들 위주로 적었다.

#재수 후 대학교 입학
2014.03 - 2014.12: 인하대학교 신소재공학과 입학(1학년)

# 패션 디자이너를 꿈꾸던 시절
2015.01 - 2015.06: 패션 스타트업 Audrey. C 마케팅 인턴
2015.06 - 2017.03: 군대(의무경찰) 복무
2016.04 - 2016.12: 군대 내에서 패션디자인스쿨 SADI 입시 준비 (2차 디자인 실기 합격 / 최종 면접 탈락)

# 복학 후 학교로 돌아와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 공부만 하던 시절
2017. 03 - 2018.12: 인하대학교 신소재공학과 (2, 3학년)
2018.12 - 2019.01: SK하이닉스 미래기술연구원 R&D 공정 팀 (선행 Etch 공정 연구) 인턴십
2019.02 - 2019.06: 대학원 입시 준비 & KAIST 신소재공학과 석사과정 합격
2019.08: 인하대학교 신소재공학과 졸업(7학기 조기 졸업 & Cum Laude(4.06/4.5))

# 대학원 합격 => 본격적으로 일탈 시작
2019.09: KAIST 신소재공학과 석사과정 입학
2020.03-2020.04: KAIST 창업 커뮤니티 T-SIAK 파일럿 프로그램 운영
2020.09 : KAIST 전략경영학회 MSK 입회
2020.12: KAIST 전략경영학회 MSK 2020F 22nd Case Competition 우승

#1년간의 창업 여정
2020.10: KAIST 전자과 박사과정 친구(통신 시뮬레이션 연구)와 창업팀 GSD 설립 (첫 번째 아이템: VR 기반 부동산 계약 플랫폼)
2021.01: 창업팀 GSD 멤버 1명 추가 영입(전자과 석사과정-AI 연구) (총 3명)
2021.02: GSD 아이템 피벗: AI 데이터 레이블링 관련 산업 tapping
2021.03 - 2021.06: E*5 KAIST 참가 및 우승 (1, 2, 3차 모든 미션 우수 팀 선정 및 최종 우승)
2021.06 - 2021.08: 다수 VC와 IR 및 term sheet 계약 논의
2021.06: 졸업논문 Defense (학위논문 주제: 원자간력 현미경을 이용한 전고체 전지의 충전량에 따른 이온 분포 영상화 및 특성 평가 / 지도교수: 홍승범)
2021.08: 팀 GSD 탈퇴/ KAIST 석사과정 졸업

#졸업 후 개발자를 향한 새로운 시작
2021.09 - 2021.10(면접 당시 재직 : 스타트업 <한달어스> 전략기획 직무/개발 공부 시작

 

하고 싶은 게 참 많은 인생이었다. 위 이력에 적지 않았지만 가장 첫 꿈은 다큐멘터리 PD였다. 영상 매체를 기반으로 사람들에게 메시지를 전하는 일을 하고 싶었다. 하지만 PD는 학벌이 좋아야 가능하다는 인식이 그 당시 뇌리에 강하게 박혀 있어서 상위 대학교에 진학하지 못했던 것을 기점으로 자연스럽게 꿈을 내려놓았다. 몇 년만 늦게 태어났다면 이 꿈을 그대로 가지고서 유튜브를 시작하지 않았을까 싶지만, 그때는 그랬다. (그래서 지금은 유튜브를 한다. 가끔씩..)

다음은 패션 디자이너였다. 대학교 1학년 시절, 옷을 정말 좋아해 수중에 돈이 조금이라도 생기면 곧장 옷 사는데 다 써버렸다. 옷을 좋아하던 것으로 모자라 이걸로 뭔가를 해보고 싶다는 열망이 생겼다. PD라는 꿈이 사라지면서 이를 대체할 무언가를 찾아야 한다는 압박 역시 있었다. 그렇게 패션 스타트업에서 인턴을 하고, 군대에서는 본격적으로 디자인 공부를 했다. 외출할 때면 왕복 3시간 거리인 학교 도서관에 가서 디자인 관련 서적을 가득 빌려와 내무반에서 보며 공부하곤 했다. 영상 매체가 아닌 옷을 통해서도 사람들에게 내가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줄 수 있겠다 싶었다. 하지만 이 역시 관뒀다. 군대에서 1년 넘게 그림 공부도 하고 디자인도 진지하게 공부했지만, 결과적으로 확신이 서지 않았다. 옷을 정말 좋아하는 것과 별개로 밥을 벌어 먹고살 수 있을까 싶은 확신이 서지 않았다. SADI는 패션 디자인 쪽으로 국내에서 손에 꼽히는 학교였지만, 공부할 때와 달리 막상 입시 면접을 보면서 전업으로 삼을 생각을 하니 두려웠다. 무지막지한 학비와 강남 한복판에서 3년 내내 살며 들어갈 돈 역시 부담이었다. 열정으로 1년 넘게 달렸지만, 막판에 현실을 생각하며 접었다.

이후는 방황의 연속이었다. 방황이라기엔 공부를 정말 열심히 했지만, 꿈이 딱히 있지 않았다. 그냥 학교 공부 열심히 하고. 장학금 타기 위해 발버둥 치고. 사기업 장학재단의 장학생으로 선정되어 졸업까지 전액 장학금을 확보했지만 그렇다고 딱히 달라진 건 없었다. 여전히 높은 학점을 유지해야 한다는 강박감이 있었다. 왜 학점을 높게 받아야 하는지도 모른 채.

 

그 와중에도 나름 꿈을 이어가기 위해 애쓰긴 했다. 디자이너라는 꿈을 어떻게든 이어 가보고 싶어서 전공인 재료공학과 연계할 방안을 모색했다. 처음에는 관심 있는 공대 출신 디자이너분께 내 포트폴리오와 함께 인턴을 하고 싶다는 콜드 메일을 무작정 보냈다. 나름 삼고초려(메일 2번에 인스타 DM까지…. 거의 스토킹 수준ㅠ)했지만 끝내 답장은 오지 않았다. 재료공학 연구 분야 중 매우 마이너한 분야인 감성 재료 분야를 찾아내 이쪽으로 연구를 해볼 수는 없을까 싶어 학과 교수님께도 상담을 많이 요청했던 기억이 난다. 정작 교수님께서는 여기는 마이너한 쪽이라 쉽지 않을 것이라며 일침을 놓긴 하셨지만. 지금 생각해보니 그 당시 지도교수님께서 현실적인 조언을 참 많이 해주셨다. 그러면서도 어떻게든 도와주려고 애도 많이 써주시고. 아무튼 재료 디자인 쪽으로 가는 건 결국 손을 놨다.

방황을 거치고 나니 3학년 2학기가 시작할 즈음이었다. 이 시기쯤 창업에 조금씩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하지만 신소재 학부 공부만으로는 무엇을 모르는지도 몰랐다. 일단 회사 경험부터 해봐야겠다는 생각에 대기업 인턴을 썼다. 현대차와 LG화학, SK하이닉스였는데, 현차와 엘화는 떨어지고 SK만 합격했다. 1개월 남짓이라는 매우 짧은 인턴 기간이었지만 회사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엿보는 귀중한 시간이었다. 그리고 이 1개월 남짓의 시간 덕분에 그간 생각지도 않던 대학원 준비를 시작하게 된다. 이유야 명확했다. 밥도 잘 나오고, 기숙사 아파트도 정말 좋고. 연봉도 짱짱하고. 하지만 여기서 내 미래를 단 한 순간도 쌓고 싶지 않았다. 무엇을 위해 일하는지 이유를 전혀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내가 있던 부서에서 부장님과 밥을 먹는데 그런 말씀을 하시더라. 

 

"이런 데 오지 말고 네이버 같은 곳 가세요."

 

그때 뭔가 웃음 반, 허탈함 반이 들었다. 인텔에서 오신 분이셨는데 '그러면 수석님께서는 대체 여기에 왜 오신 건가요..?'라는 질문이 턱 끝까지 차올랐지만, 그냥 웃어넘겼다. 상무님과 부서 전체 면담을 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상무님께서는 부서원들에게 Think out of the box를 열심히 외치셨는데 대체 대기업에서 어떻게 out of the box를 하라는 건지에 대해서는 1도 설명이 없었다. 손들고 질문까지 했는데 별 이해가 되지 않는 장황한 말뿐이었다. 여기 있으면서 무엇을 배울 수 있을지 감이 오지 않았다.

창업을 하기 위해 가장 중요하게 쌓아야 하는 건 문제 해결 능력이라 생각했다. 적어도 이를 큰 회사에서 기르기는 힘들겠다 판단했다. 그러면 어디 가서 배울 수 있을까? 지금까지 내가 쌓아온 것을 바탕으로 가장 최적의 선택은 대학원이었다. 인턴이 끝나자마자 대학원 준비를 시작했다. 마침 4학년 1학기 시절, 창업 관련 수업을 들으며 기술창업에 대한 열망이 꽃피기 시작했다. 대학원에 가면 연구 경험을 바탕으로 기술 창업을 해야겠구나! 라는 생각이 정립됐다. 연구를 열심히 하고 그 경험을 바탕으로 뭔가를 이뤄보자!

 

대학원에 빨리 가기 위해 한 학기 일찍 졸업하고 그해 가을, 바로 카이스트 신소재공학과 대학원에 입학했다. 그런데 어라, 연구란 무엇인지 아무것도 경험이 없었기에 대학원에 와서 역시 방황의 연속이었다. 성격상 연구실에 우직하게 앉아 논문을 읽고 공부하고 실험하기에는 하고 싶은 것이 너무 많았다. 창업에 대한 꿈을 여기서 펼쳐보고 싶다는 열망이 강했다. 무엇이라도 해야 할 것 같아 창업 동아리도 만들어보고, 창업 관련해서 공부하고 생각한 인사이트를 블로그나 페이스북에 꾸준히 글로 쓰기도 했다. 창업하기 위해 가장 좋은 루트가 무엇일까 고민하다가 컨설턴트라는 직업에 꽂혀 대학원생 신분으로 전략경영학회 MSK에 입회하기도 한다. 그러다 같이 학교에 있는 박사 과정 친구와 연이 닿아 창업팀을 꾸린다.

1년간의 창업 팀 여정 끝에 내린 결론은 "직접 무언가를 만들어보는 경험을 해야겠다"였다. 경영학회에서도 전략기획을 짜는 것에 대해 배웠고 창업팀에서도 비즈니스 포지션을 맡았기 때문에 프로덕트를 만드는 경험에 대해서는 전무했다. 더욱 사용자의 관점에서 제품을 만들어보는 경험을 해야 훨씬 유리한 포지션에서 창업을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비즈니스를 하면서도 늘 고민하고 가장 중점적으로 생각했던 게 "유저에게 가치를 주는 프로덕트를 팔아야 한다"였다. 내가 내 프로덕트에 확신이 없는데 대체 어떻게 물건을 팔 수 있을까. 이게 지난 창업이었던 딥테크 기반 스타트업에서 비즈니스 직무를 하며 가장 힘들었던 점이다. 내 물건에 확신을 하려면 나부터 그 물건을 깊이 이해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사기다. 그러기 위해서는 직접 만들어보는 경험을 해야 한다. 그것도 어쭙잖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실제 필드에서 팔리는 물건을 손대보면서 경험해야 한다. 그게 프로의 세계니까.

이런 로직으로 개발자가 되기 위해 여기까지 왔다. 글 한 단락 한 단락만 보면 이리 갔다 저리 갔다 통통 튀는 인생처럼 보이지만 나름 일관된 관점이 있다. 내가 만든 결과물로 상대방에게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 PD, 디자이너, 연구원, 컨설턴트, 창업가, 그리고 지금 개발자까지. 각 직업이 만들어내는 결과물은 소통하기 위한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 핵심은 "그래서 어떤 메시지를 전달할 것이냐"이다.

또 꿈이 바뀔 수 있다. 또 다른 직업을 꿈꾸는 건 이제는 너무나도 익숙한 일인지라 그러려니 하기로 했다. 다만, 적어도 그 꿈을 붙들고 있을 때만큼은 프로의 자세로 해야 한다는 게 철학이다. 나중에 개발자를 안 할 수도 있지만 적어도 개발자를 준비하는 지금만큼은 내가 가진 꿈을 존중하고 그에 맞는 태도를 보여야 한다. 의장님께서도 말씀하셨다. 지금 5개월이 지나고 개발자를 안 할 수도 있지만, 그 선택을 내리는 데 있어 정글에서의 경험이 정말 많이 도움 될 것이라고. 그러니 개발자를 그만둬도 후회가 없을 것이라고. 100% 동감하는 바이다.

 

하지만 지금 생각으로는 이전 창업에서 못다한 꿈인 유저에게 가치를 주는 프로덕트를 만드는 경험을 진지하게 해보고 싶다. 결국에 나는 세일즈를 하는 사업가로 갈 생각이지만, 내 사업의 철학은 고상한 첨단 제품 따위가 아니다. 유저가 지닌 문제를 "실제로" 해결해주고 있느냐(가치제공), 그것을 남들보다 더 잘하느냐(경쟁우위). 이 두 가지를 만족하는 사업을 한다면 이기는 게임이라는 비전이 있다. 이 두 가지를 제대로 경험하기 전까지는 계속 개발자로 지내볼 생각이다.

정글이 끝난 후 나는 어떤 곳일지 모르겠으나 정말 유저에게 가치를 주는 제품을 만드는 회사에서 개발자로 당당히 일하고 싶다. 그곳에서 제품을 요리조리 뜯어보며 어떤 점에서 유저에게 가치를 주는 것인지 철저하게 배울 생각이다. 일하면서 빡세게 배우고 나면 나도 그런 제품을 만들거나 볼 수 있는 능력이 생기지 않을까. 그때까지 계속 정진해보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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